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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16. <부정공>남천공휘희규가장(南川公諱憙奎家狀)
1. 문헌 목록 〉21. 21世 〉18. <부정공>소강거사휘정현묘표(小江居士諱正鉉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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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정공>난파공휘병규묘갈명(蘭坡公諱炳奎墓碣銘)
蘭坡公諱炳奎墓碣銘 嗚呼我 長陵丁丑南漢下城之役尚忍追言哉吾邦之所以有辭天下而無愧小中華之稱者寔由於當日洪尹吳三學士之絶域一死而迄于今走卒之知兒童之誦至有欲百其身而贖於千載之下也然而禁苑大報壇華陽萬東廟 皇靈妥享之後或不敢於一體之祀則尚可祠宇之隣設而一於闕如可勝歎哉盖有之矣我未之見也日昇平趙君漢容將其曾王考諱炳奎字元瑞號蘭坡之遺事狀及其門長老耳目所曙記而徵余外碑之銘第其家備經厄難青氈舊物蕩佚無存而百年故紙疏草宛在依然是古壁科斗也遂感而爲之叙曰趙氏以高麗大將軍諱璋爲初祖至侍中忠獻公元吉策功封玉川是爲貫是生副正瑜麗亡守罔僕節嗣是宦與儒間有聞人曾祖宅淳祖昌根考熙燁俱隱而不耀妣陽城李氏陽重女以 純廟丙午正月二十日生公幼有英氣嬉戯能指麾隊曹及就學不屑屑於撿押之拘奥賾之搜而務領其歸趣着史究古今治亂成敗之機良猷忠言之獻替運之於心術參之以時局有擧而措之之意凡州里之過難事衆所甲乙者多取裁於公焉 哲宗乙未用太學士文忠公范景文配之毅皇己例以吾邦三學士亦當躋享事四道儒士將治疏叫 閽推公爲道掌議疏徹爲當路相臣所沮而特施誅竄 典公遠責于鍾城距家三千里公夷然登程脚淋漓無幾微見於言面邊俗貿甚公敎引不倦所居絃誦相聞癸亥聞 睿陵恤報登山痛哭如不欲生 高宗丙寅聞海宼陶沁都而曰此誠士子奮義之秋而奈幽纍如此何長吁短歎嗒然如喪者累日是年冬始蒙有將還鍾之士胥出餞于驛亭或有泣下者閱月僅抵京闉卿士大夫餽贐贈詩慰藉甚欵歸家始入境聞朞月之間二親相繼殞逝哀號擗踊頓絶方蘇起居飲食動遵禮經曾不以齊喪不及之年而減廢節目也以戊辰五月十五日考終葬于佛堂洞負酉原配宜寧南氏著閨範有一男鍾㬢孫男聖洙忠洙根洙女鄭基秀漢容根洙子也曾以下不能悉嗚呼直之一字孔朱以來單傳旨訣而公雅直道自信則平生行誼固多可紀而公之族孫學洙公之狀既備而門黨之秀亦有所錄故最而著其大者銘曰 有玉蘊櫝廉而不劌買用不售自求是戾有刃藏鞘若硎于發簿言一試遽嬰摧齾然而士之過不過固有闕於時之亨蹇其得於巳者則何足以是加損哉 惟端蒙協治清和節 竹溪 安塑 撰 난파공휘병규묘갈명(蘭坡公諱炳奎墓碣銘) 아、 슬프다。 인조(仁祖) 정축년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굴복한 일을 그 어찌 말하겠는가。 우리 나라가 천하에 이름이 나고 소중화라 일컬은 것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은 곧 삼학사인 홍 익한(洪翼漢)·윤 집(尹集)·오 달제(吳達濟)가 먼 타국에서 죽은 결과이다。 이제까지 달리는 졸도가 알고 아동이 왼 것은 그 몸으로 힘써 천년 후에 속 바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금원(禁苑)대보단 화양 만동묘에 황제의 정령을 편안히 모신 뒤에는 일체의 향사가 감히 행해지지 못할 것인즉、 일찌기 사우를 이웃에 설치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한결같이 궐한 것 같으니 가히 이겨 탄식하겠는가。 대개 있다고 하나 나는 보지 못하였다。 승평조군 한용(漢容)의 증조는 휘가 병규(炳奎)이고 자는 원서(元瑞)이며、 호는 란파인데 하루는 유사장 및 그 문중 장로의 이목을 기록한 것을 가지고 나에게 비의 명을 청하였다。 이제 그 집이 액난을 거듭 겪어 가보나 구물은 탕질하여 있는 것이 없었으나 백 년된 고지나 소초(疏草)가 전가 다름없이 완전히 남아있으니 이는 고벽에 숨긴 가장 오래된 문자다。 마침내 감동하여 이에 서술하여 쓴다。 조씨는 고려 대장군 휘 장(璋)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시중 충헌공 휘 원길(元吉)대에 이르러 정책한 훈공으로 옥천군에 봉하여졌는데 이로서 관향을 삼았다。 생휘 부정 유(瑜)는 고려가 망하자 망복 절의를 지켰으며 이에 과환과 석학이 대대로 낳고 간간히 드날린 사람이 있었다。 증조는 택순(宅淳)、 조는 창근(昌根)、 고는 희엽(熙燁)인데 함께 은거하여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비는 양성 이씨(陽城李氏) 양중(陽重)의 따님으로 순조(純祖) 병오년(丙午年) 一월 二十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걸하여 놀이할 때에는 능히 무리를 지휘하였으며、 입학하여서는 비교하고 단속한 것과 깊어 보기 어려운 점을 찾기를 좋아하였다。 깊은 뜻을 힘써 터득하고、 사기를 보며 고금의 치란 성패의 기틀과 어진 계책과 충성된 말 올린 것을 연구하였으며、 막힌 운수에 대한 마음과 꾀를 시국에 참조하여 들었다 놓았다 할 뜻을 가졌다。 무릇 고을과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나 갑과 을이 서로 다투었을때 많이 재결을 받았다。 철종(哲宗) 기미년(己未年一八五九)에는 태학사 문충공 범 경문(范景文)을 의황(毅皇) 사당에서 배양한 예로서、 우리나라의 삼학사도 마땅히 배향해야 한다고 글을 올렸다。 이에 四도의 선비가 소장을 써 가지고 대궐에 알리고자 하고는 공을 추대하여 도장의로 삼았다。 소장을 올렸으나 현직 상신들이 막았으며、 특히 주찬전을 베풀어 공을 집에서 삼천리나 떨어진 종송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공은 태연히 길을 떠났다。 다리에서 피가 지적지적 흘러도 조금도 말과 안색에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변방 풍속이 심히 무례하였으나 곡이 정성껏 교도하자 거처 한 곳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리었다。 계해년(癸亥年)에 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에 올라 통곡하기를 살고자 아니할 것 같이 하였으며、 고종(高宗) 병인(丙寅年)에는 바다의 도적이 강화도를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이 때가 진실로 선비가 의리를 뽐낼때인데 이와 같이 깊숙이 풀려 돌아가니 종성의 선비들이 서로 다투어 나와 역정까지 전송하는데、 간혹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한달여 만에 서울에 도착하니 경사 대부가 물품과 시를 주며 심히 정성어린 위로를 하였다。 집에 돌아올 지경에 一년 사이에 양친이 서로 이어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슬피 부르짖고 가슴을 치며 뛰다가 아득히 끊어졌다가는 다시 소생하였으며 기거나 음식을 예경에 따라 하며 일찍 초상 때 못 미쳤다 하여 절목을 감히 폐하지 아니하였다。 무자년(戊子年) 五월 十五일에 고종하니 불당동 부유원(佛堂洞 負酉原)에 장사하고 부인은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규범이 있었으며 아들은 종희(鍾㬢)요、 손남은 성수(聖洙)·충수(忠洙)·근수(根洙)며 딸은 정기수(鄭基秀)의 처이고 한용(漢容)은 근수의 아들이다。 아、 슬프다。 곧은 직자한자를 공자·주자 아래로 단지 그 뜻과 비결을 전하고 공이 바르고 곧은 길로서 스스로 믿었은즉 평생의 행의는 진실로 가히 으뜸이었으며、 공의 족손 학수(學洙) 공의 글이 이미 갖추어지고 종당의 수재가 또 기록한 것이 있는고로 가장 큰 것을 나타내서 새겨 말하기를、 옥을 싼 독이 있어도 청렴하여 찢지 아니하고(有玉蘊櫝廉而不劌) 사서 쓸려고 하여도 팔지 아니하니 스스로 구한 것이 어기어지도다(買用不售自求是戾) 칼날이 있어 칼집에 감추고 숙돌을 찾아낸다(有刃藏鞘若硎于發) 한 번 시험에 가볍게 말하여 문득 번복되어 이즈러진 그릇이 되었다。 (簿言一試遽嬰摧齾) 하였다。 선비는 대를 만나고 못만남이 진실로 성쇠가 있나니 이왕 얻은 것을 어찌 족히 이로서 더하고 덜할 것인가。 죽계(竹溪) 안소(安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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